일본 기업, 뛰어난 인재도 바보로 만든다
나는 10년 가까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기업 운영을 하는 일본의 한 대기업에서 일을 해 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시간이라는데, 그 세월 동안 일본 기업에서 일하면서 충분히 경험하고 보고 느낀 바가 있다.
그중에서 내가 이 포스팅에서 이야기해보려고 하는 점은 바로, 일본의 직장인들은 '사고가 정지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다.
내가 유학시절에 만나왔던 일본의 대학생들은, 아주 개성이 강하고,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그리고 인생을 즐길 줄도 알고 여유도 있었으며, 언제나 유쾌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면서 이런 모습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일본의 기업은 이런 행동양식을 어린애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의젓한 어른이 되려면, 이런 모습들을 싹 지우고, 철저히 틀에 부어서 찍혀 나온 붕어빵 같은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외형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 어떠한 수재라 할지라도 기업의 구성원이 되면, 점차 바보가 되어간다.
어째서, 일본의 기업은 인재를 바보로 만드는가?
내가 경험한 일본 기업의 근본적인 문제는, '지나친 전례주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기업의 지나친 전례주의
일본의 기업에서 일을 처리하고, 상사에게 가져가면 피드백이랍시고 반드시 돌아오는 질문이 있다.
"이거 ●●●씨에게 물어보고 한 거 맡죠?"
"그 생각은 예전에 누군가의 실적을 참고해서 제안하는 겁니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역시나 ●●●씨가 전문가인데, 이 안건 가져가서 있을법한 이야기인지 한번 상담해 봤어요?"
"아이디어는 좋은데, 과거에 참고할 만한 예시는 없는지, 일단 사내 데이터 베이스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오세요"
대부분의 관리자들은, 부하의 제안사항이나 아이디어 그 자체에 대해서, 논리적・창의적으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순수하게 판단하지 못한다. 단지, 자신의 경험과 기억 속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훌륭한 예시를 참고를 했는지에 대해서만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전례주의란 무언가를 실행할 때, 과거의 방식이나 결과를 따르는 생각 방식이다. 과거에 했던 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그 자체는 문제없으나, 반드시 사고한 결과의 의사결정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이와 유사한 생각 방식으로, 사법의 판례주의가 있다. 하지만 사법의 판례주의와,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비즈니스에서는 전례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판례주의가 불평등을 없애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에 반해, 비즈니스에서는 전례주의에는 그러한 필요성의 논리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입으로는 ‘바꾸고 싶다’고 이야기해도, 실제로 하는 방식이나 생각 방식을 바꾸려고 하면 저항감을 가질 것이다. 원래, 이러한 문제가 있으면 자정작용이 작동해야 하나, 많은 경우, 연배가 많은 사원이나 관리직원들부터가 사고가 정지되어 있어서 자정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일본도 한국처럼 유교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어, 젊은이들이 사회를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기업 안에서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난항을 거듭하는 의사결정만이 내려진다.
일본 기업은 최적화에 의한 퇴화만 있을 뿐이다
전례주의에 빠지게 되면, 룰에 얽매여, 전두엽을 사용하는 크리에이티브한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다. 기억에만 의존하게 되고, 과거에 대한 '최적화'만 실행하는 삶의 방식을 채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지속되면 점점 사고를 잃어 간다.
여기서 말하는 '최적화'는, 생명의 레벨로 보면 진화가 아니라 퇴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빠르게 헤엄치며 사냥도 하고 천적으로부터 잘 도망갈 수 있도록 매끈한 유선형의 몸을 만들려면 팔은 불필요해진다. 헤엄치는데 최적화된 형태를 지니려면 팔을 떼어내는 것이 맞다. 이는 물 속이라는 환경에서는 최적화이며, 이 최적화에 의해 팔을 떼어내는 '퇴화'가 선택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저 물 밖의 육지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한 번쯤 상상해보고, 호기심에 물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처음으로, 지금까지는 불필요했던 팔이 필요한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인류의 오랜 진화의 시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중 속 생물의 이러한 돌발적인 선택이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팔을 퇴화시키는 '최적화'가 아닌, 물 밖으로 뛰쳐나오는 돌발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팔을 키워나가는 적응 단계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에서는 최적화를 잘 해내는 사람이 머리가 좋다고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 만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결과, 결국에는 일본 기업들 스스로가 퇴화하고 말았다.
이는 크리에이티브한 발상에 대한 리스크를 지나치게 부각한 그릇된 발상의 말로라고 생각한다.
일본 기업은 전례주의의 의사결정에서 벗어나, 크리에이티브한 발상을 지닌 '사고하는 인재'를 키우지 않는 이상, 잃어버린 지난 몇십 년의 세월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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